얼마 전 엘리자베스 여왕께서 서거하셨다. 그녀의 일대기와 더불어 같이 거론되는 것은 아무래도 비운의 왕세자비라 불리는 다이애나 스펜서일 것이다. 영화는 크리스마스 연휴기간 동안 왕실 별장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통해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숨 막히는 심경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게 표현하고 있다. 과연 우리는 부와 명예만 있다면 행복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왕세자비의 일상을 통해 감독은 무엇을 전하고 싶었을까?
왕세자비 다이애나의 일상을 조금이나마 들여다볼 수 있는 영화
푸른 초원을 가로질러 군용 트럭들이 줄지어 가고 있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어느 고풍스러운 느낌의 대저택. 도착한 군인들은 조심스럽게 식자재가 담긴 상자들을 연이어 나른다. 다른 군인들은 저택의 곳곳을 살펴본다. 이윽고, 요리사들이 줄지어 주방에 들어온다. 경건한 표정으로. 가장 높은 지위로 보이는 주방장이 그들을 "제군"이라 칭한다. 대체 어떤 이들이 오길래 이러는 것일까. 한편, 오픈카 한 대가 이곳을 향해 달려오고 있다. 차를 운전하고 있는 이는 다름 아닌 다이애나비.
어떠한 경호도 없이 홀로 운전해서 오는 그녀. 하지만 길을 잃은 다이애나는 어쩔 수 없이 주변의 레스토랑에 들어가 길을 묻는다. 그녀가 들어서는 순간, 그녀에게 모이는 시선과 침묵. 다이애나는 예상했다는 표정으로 아랑곳하지 않고 길을 묻는다. 그때쯤 저택에서는 왕실 가족 및 귀빈들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저택 입구에서 특이한 방법으로 들어서는 귀빈들의 몸무게를 쟤는 집사. 다이애나의 소식과 더불어 지각을 논하는 그들의 표정에서 알 수 없는 분위기가 감돈다. 여전히 길을 헤매고 있는 다이애나. 때마침 마주친 왕실 요리사 대런이 그녀를 발견한다. 다이애나의 안부를 묻는 걸 보니 서로 잘 아는 관계인 듯하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다이애나는 그제야 자신이 서 있는 곳이 낯익은 곳임을 알게 된다. 저 멀리 들판에 서 있는 허수아비에게서 아버지의 코트를 발견한 다이애나. 요리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다이애나는 허수아비에게서 코트를 벗겨 소중히 품에 안고 돌아온다. 마치 잃어버린 무언가를 되찾은 것처럼. 잠시 후 저택에 왕실 사람들이 연이어 도착하고, 함께 도착한 다이애나는 입구에 있는 어이없는 몸무게 측정을 하지 않으려 집사와 실랑이를 벌인다. 하지만 완강한 집사의 태도로 어쩔 수 없이 응하는 다이애나. 저택을 나가기 전과 후의 몸무게가 달라짐으로써 연휴를 즐겁게 보냈다는 물리적 증거 때문에 남아있는 이 어이없는 제도에 다이애나는 다시금 왕실 생활의 답답함을 느낀다. 다이애나의 목소리를 듣고 달려 나오는 두 아들들. 아들들을 품에 안고 기뻐한 것도 잠시, 바로 이어지는 숨 막힐듯한 왕실 접대 스케줄에 다이애나는 공황 증상을 느끼며 중얼거린다. 3일만 참으면 된다고...... 무거운 마음을 안고 복도를 걸어가는 다이애나의 눈에 익숙한 누군가가 걸어오고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메기. 유일하게 다이애나가 마음을 놓고 편하게 대할 수 있는 왕실 직원이었다. 덕분에 다이애나의 마음은 조금이나마 가벼워진다. 오랜만에 만난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는 다이애나. 큰 아들인 윌리엄 왕자는 다이애나의 상태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끼고, 다이애나를 걱정스러운 눈길로 바라본다. 잠시 후 응접실에서 무언가를 찾는 다이애나. 그녀의 손에 들린 것은 남편인 찰스 왕세자가 준 진주 목걸이. 목걸이를 본 다른 직원이 예쁘다고 하자 다이애나는 슬픈 미소를 짓는다. 이 목걸이를 자신만 선물 받은 게 아니라고 하면서.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다이애나는 한 권의 책을 집어 든다. 그것은 앤 불린의 이야기를 담은 책. 다이애나는 마네킹에 걸어놓은 아버지의 낡은 코트와 대화하기 시작한다. 국왕이 다른 여자를 사랑하기 위해 버려진 앤 불린의 이야기를. 아마도 그녀는 이렇게나마 누군가에게 자신의 처지를 이야기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잠시 후 자신의 옷시중을 도와주려 들어온 매기. 감정이 복받쳐 괴로워하는 다이애나를 매기는 다독여준다. 누구보다 다이애나의 처지에 공감해주는 매기. 그런 매기 덕분에 다이애나는 가까스로 감정을 가다듬는다. 주방에서는 저녁 만찬 준비가 한창이다. 요리사들에게 왕세자비가 접시를 다 비울 정도로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소리치는 대런. 그의 말속에서 그가 얼마나 다이애나를 인간적으로 신경 써주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모두가 모인 왕실 저녁 만찬. 촛불이 잔뜩 켜진 성대한 분위기의 식탁과는 달리 한마디 말도 없이 침묵을 지키며 식사하는 그들. 너무나 이질적인 분위기에 다이애나는 환영을 보게 된다. 어렵게 식사를 마친 다이애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화장실로 가서 먹은 것을 모두 토해낸다. 어떻게 해야 이 상황을 견뎌낼 수 있을까. 화장실에 주저앉은 다이애나는 그렇게 한참 동안을 앉아있었다. 모두가 잠든 밤, 몰래 주방 냉장실로 향하는 다이애나를 누군가 조용히 지켜본다. 냉장실 안 음식을 허겁지겁 먹으며 허기를 달래는 다이애나. 그런 다이애나를 따라온 이는 바로 집사 그레고리.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그에게 다이애나는 다시 한번 숨 막히는 분노를 느낀다. 그런 마음을 주체하지 못한 다이애나는 기분을 달래기 위해 산책을 나가지만, 그마저도 왕실 경찰들에게 제지를 당한다. 이제 그런 그녀에게 그나마 마음의 의지가 되는 것은 두 아들들뿐. 아들들과 있을 때는 유일하게 평범한 엄마로 돌아감을 느끼는 그녀였다. 아들들과 진실게임을 하며 자신의 고통스러운 마음을 애써 추스르는 다이애나. 아이들 역시 엄마의 웃는 얼굴을 보기 위해 엉뚱한 질문을 하며 애써 현실을 외면하는 듯하다. 다음 날 아침, 다이애나는 그레고리 소령에 의해 매기가 다른 곳으로 보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자신의 의견 따위는 없는 왕실 스케줄과 의상 코디. 다이애나는 절규하듯 부탁한다. 매기만큼은 다시 자신에게로 보내달라고. 유일하게 자신이 온전한 상태로 버틸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람인 매기를. 계속해서 연이어 나오는 만찬 준비 장면들. 마치 다이애나를 그들의 의도대로 건강해 보이도록 물리적인 힘을 가하는 느낌이다. 다이애나의 정신적 고통은 전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일요일 아침, 왕실 가족들이 함께 성당에서 미사를 올리고, 사람들 사이에서 다이애나는 보게 된다. 자신의 남편과 남편의 내연녀가 눈빛을 주고받는 장면을. 하지만 다이애나는 그런 마음을 숨긴 채 가족들과 함께 사람들과 카메라 앞에 서서 미소 짓는다. 다이애나 본연이 아닌 왕세자비의 모습으로. 오로지 사람들이 원하는 모습은 그것뿐이니 말이다. 저택으로 돌아온 다이애나. 창 밖에서 총소리가 들린다. 사격 연습을 하는 찰스 왕세자와 윌리엄 왕자. 하지만 다정한 아버지와 아들의 모습은 절대 아니다. 사격 교사에게 연습을 시켜서라도 두 발은 맞히게 만들라고 명령하는 찰스 왕세자. 그의 모습에서 얼마나 사람들의 이목을 신경 쓰는지 알 수 있다. 찰스에게 찾아가 인간애와 평범한 행복을 부탁하는 다이애나. 절박한 그녀의 모습과는 달리 찰스는 냉정하게 그녀에게 왕실 식구로써의 모습만을 강요한다. 그들의 대화를 통해 둘의 관계는 서로 마주 보고 선 당구대의 길이만큼 절대로 좁혀지지 않을 것임이 느껴진다. 절망하는 다이애나. 다이애나는 결국 시어머니인 엘리자베스 여왕에게까지 찾아가 자신이 처한 상황을 조심스럽게 털어놓는다. 자신의 남편이자 엘리자베스의 아들인 찰스의 마음을 돌려놔 달라고. 하지만 엘리자베스는 그런 다이애나의 고민을 그 자리에서 웃으며 넘겨버린다. 다시 한번 다이애나는 왕실의 위엄과 안위에 자신의 고민 따위는 절대 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녀의 말에 귀 기울여 주는 이들은 그녀의 주변에 있는 직원 매기와 요리사 대런 밖에 없는 상황. 이런 상황 속에서 다이애나는 힘겹게 연휴를 버텨내고 있다. 절망하는 마음으로 방으로 돌아온 다이애나. 창 밖을 볼 수 없도록 꿰매져 있는 커튼과 드레스 코드가 정해져 걸려 있는 의상들을 보며 그녀는 얼마나 숨 막힘을 느꼈을까. 숨겨놓은 공구를 찾아 커튼을 찢고 비로소 큰 숨을 몰아쉬는 그녀. 언제라도 터질 것 같은 그녀의 불안한 모습에 아들 윌리엄 역시 불안함을 느낀다. 공황 증세가 극까지 오자 다이애나는 자신을 자해하는 상상과 매기의 모습, 앤 불린의 환영까지 환각처럼 보게 된다. 불안한 다이애나의 행동에 모두의 촉각이 곤두서 있는 상황. 하지만 그와는 다르게 저녁 모습의 만찬은 평화롭다. 너무나 가식적인 그들의 모습을 대변하는 것처럼. 폐허가 된 자신의 생가로 찾아가 어릴 적 기억을 떠올리는 그녀. 도대체 어디서부터가 잘못된 것일까. 오열하는 다이애나. 어릴 적 꿈 많고 웃음이 맑던 행복한 자신의 모습이 왜 이렇게까지 된 것일까. 복싱 데이 아침, 침대에서 깬 다이애나는 눈앞에 있는 매기를 보게 된다. 진짜 매기냐고 묻는 다이애나. 물음에 응답이라도 하듯 다이애나의 손을 잡아주는 매기. 다이애나의 손에 매기의 따뜻한 온기가 느껴진다. 다시 돌아온 매기와 산책을 하는 다이애나. 삶의 끈마저 놓으려고 할 정도로 지쳐 있는 다이애나에게 매기는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며 그녀를 달래준다. 매기 덕분에 다이애나는 조금씩 마음이 회복됨을 느낀다. 사냥 시간이 되어 찰스는 윌리엄을 데리고 윌리엄의 첫 사냥을 하러 나간다. 왕실의 전통이기에 윌리엄의 의견과는 상관없이 진행되는 의식. 다이애나는 그런 윌리엄의 속마음을 알기에 두 아들을 데리러 사냥터로 찾아온다. 아버지의 낡은 코트를 입는 다이애나. 그런 그녀에게 코트는 어쩌면 위태한 그녀를 지탱해 주는 물건이라 할 수 있다. 사냥을 시작하려는 찰스의 앞을 가로막는 다이애나. 그녀는 소리친다. 아이들을 자신에게 보내달라고. 그러지 못하면 자신을 쏘라고. 그런 그녀의 눈빛을 읽은 찰스. 아무 말 없이 다이애나에게 아들들을 보내준다. 기다렸다는 듯이 다이애나에게로 달려가는 아들들. 아이들과 함께 밝게 웃으며 떠나는 다이애나.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찰스의 눈빛에 알 수 없는 공허함이 느껴진다. 아이들과 떠나는 그녀에게 마지막으로 대런이 묻는다. 음식이 필요하냐고. 다이애나는 밝게 웃으며 말한다. 정말 맛있는 음식을 먹으러 갈 거라고. 왕실의 호화로운 만찬 음식을 뒤로하고 그녀가 원하는 음식의 의미는 단순히 먹는 것 그 이상의 의미였을 것이다. 아이들과 신나게 팝송을 들으며 도착한 곳은 바로 KFC. 부둣가에 앉아 아이들과 함께 드라이브 스루에서 주문한 감자튀김과 치킨을 먹으며 다이애나는 비로소 음미한다. 일상에서 느끼는 소박한 행복을.
부와 명예만 있다면 행복할 수 있을까에 대한 물음
우리는 부유한 이들의 삶을 부러워한다. 마치 그들처럼 부를 가지게 되면 나도 저들처럼 행복할 수 있을 거야라고 상상하면서 말이다. 과연 부와 명예가 삶의 행복에 전부일까? 하지만 보이는 삶과 다른 그들의 실상을 들여다보면 매일을 힘들어하는 우리와 그다지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을 종종 느낀다. 부와 명예를 가진 왕세자비가 아이들과 몰래 촛불을 켜고 속삭이듯 노는 것이 마음의 유일한 안식처인 것처럼 말이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죽은 꿩이 군인 트럭이 지나가는 도로에 아슬아슬하게 놓여있다. 감독은 어쩌면 이 장면을 통해 왕실에서 영혼이 망가지고 있는 다이애나의 모습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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